2025 필드트립
2025.7.8. — 7.11.
— 박수정, 전지희, 한문희(DCW 2025 Alumni), 유진영, 장혜정(두산아트센터), 최빛나(DCW 2025 슈퍼바이저)
DCW는 첫 번째 아시아—태평양 지역 필드트립으로 필리핀 마닐라에 방문했다. DCW 2025 참여자들은 7월 8일부터 11일까지 3박 4일간 마닐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콜렉티브와 만났고, 현지의 여러 기관과 역사적 장소들을 방문하였다. 경계 없는 대화와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의 연결고리를 찾으며 더 큰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Day 1 - 마닐라 I 마카티 시티
Day 2 - MCAD와 함께 바탕가스 지역 탐방⠀
Day 3 - 패시그 시티 I 필리핀 대학교 I 케손 시티
Day 4 - 인트라무로스 I 에스콜타
일주일의 필드트립을 소화하는 데는 그보다 훨씬 느리고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가득 채운 물리적인 이동과 낯선 만남의 자리들을 돌고 돌아 마침내 익숙한 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던 것은 내 안에 들어온 것들을 어떻게 꺼내어 놓을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이 과정까지가 필드트립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마닐라에서의 다양한 만남을 돌아보며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수많은 ‘자리’와 ‘환대의 태도’였다. 미팅을 제안하며 우리가 문을 두드렸던 작가, 기획자, 연구자들은 모두 주저 없이 시간을 내주었고, 낯선 방문객인 우리에 대한 이들의 환대는 함께 나눈 대화 속에서 드러난 각 개인의 작업 방식과 주제 속에 스며 있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맞이하는 그들의 태도와 마음에도 온전히 깃들어 있었다.
이솔라 통(Isola Tong)이 직조(Weaving)를 매개로 작업하며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방식은 자연이 본래의 제자리에 있지 못해 발생한 단절, 재난과 붕괴로부터 이를 회복하기 위한 커다랗고 섬세한 짜임새를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또한 사카(SAKA)는 농부, 어부들과 협력하여 이들이 처한 경제적·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술의 언어를 통해 힘을 실어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지식(예술을 통한 자기 표현법, 작물을 키우는 법, 요리 레시피, 타투)을 배우고 익히며, 이것이 사회 속에서 새롭게 순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실천을 이어가고 있었다. 98B Collaboratory는 특별한 조건의 세입자가 되어 건물 주인 가족의 역사 아카이브를 관리 및 전시하며 건물 내 거점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을 다시 또 다른 예술가들에게 공유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환대란 낯선 자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방적인 흐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거나, 꼭 맞는 자리가 아닐지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낯선 자만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보다 큰 지지 방식이었다. 마치 함께 춤추며 스코어(Score)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속에 디스코어링(De-scoring)이 언제든 침투해도 괜찮은, 여전히 함께 혹은 스스로 흔들거리며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술이 교육으로 이어지고 노동에 귀 기울일 때,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할지를 고민하기보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내놓는 것, 즉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과 태도를 나의 큐레토리얼 안에서 어떤 모양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부단히 고민해보고자 한다. 다양 이라올라(Dayang Yraola)의 안내를 따라 기름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덜컹 덜컹 마닐라 UP대학교 캠퍼스를 달리던 지프니에 올라타던 사람들, 서로의 손을 거쳐 동전을 건네주던 모습, 얇은 줄을 당기면 곧장 속도를 줄이던 순간처럼,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가 예술이 되고, 그것을 엮어내고 때로는 매듭을 바꿔 풀어헤치기도 하는, 덜컹거리는 자리가 가득한 큐레이팅에 대하여.
— 박수정(DCW 2025)
필리핀을 다녀온 이후 나는 묘한 찝찝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되갚기 어려울 만큼 따뜻하고 진심어린 마음을 나눠 받으며 생겨난 모종의 부채감과, 필드트립을 통해 배운 것을 선명하게 그려내거나 말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당혹감 사이에서 비롯된 것 같다. 하루하루 만남이 이어지며, 필리핀 사회 깊숙이 자리하는 식민 역사의 잔재, 부패와 독식, 사회 인프라와 공권력까지 장악한 아시엔다(Hacienda) 가문들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 구조가 예술계의 시스템과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구조에 맞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아픔에 눈물짓고 함께 힘을 모아 실천을 이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렴풋하게나마 지형도를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일 뿐이었고, 여러 오해와 이해, 그리고 여전히 물음표로 남은 질문들과 뒤섞인 채 지도에 막 점 하나를 찍어 둔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필드트립의 의의를 '다음을 위한 참조점'으로 찾아 본다. 다음의 사유와 배움, 경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참조점을 마킹해 놓는 것. 기꺼이 초대하고 귀한 시간을 내어준 이들과의 만남은 이어짐과 재회를 기대하게 했고,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하고 남겨둔 것들과 무산된 계획은 다시 찾을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마닐라에서 4시간쯤, 먼 길을 달려 도착한 바탕가스의 마할리나 농장에서 뚜 뚜 뚜 뚜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목관을 두드리는 듯한 맑고 큰 울림이 아름다워 한참을 귀 기울였는데, 탐조 앱은 그것이 붉은 가슴 오색조(Coppersmith Barbet)과의 새라고 알려주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끝내 그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 울음소리는 유난히 오래 남았다. 어여쁜 새소리의 여운처럼 필리핀에서의 만남과 대화가 내게 남긴 자욱들을 되새기며, 이어질 다음을 기약해본다.
— 전지희(DCW 2025)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디에 머무르고, 언제 끝나는가. 모두에게 수많은 사랑의 모습이 있다. 어떤 사랑은, 보지 못했던 것을 봄으로써 발화(發火)되는 사랑은 때로 아주 강렬한 온도로 밀집되었다가 잔잔히 마음 안 쪽에 얕고 지난한 불꽃으로 유지된다. 리서치를 하며 막연하게 모인 뭉글뭉글한 이야기들이 지금 그렇게 타올랐다가 여기에 남아있다.
길고 무겁게 내려앉은 커튼과 창문을 앞에 두고 한 단 올린 평상 앞의 기억이 그중에 하나일 것이다. 개인사와 사회적 폭력의 경험, 그것을 감싸안는 애정에 대해 차분히 말하던 키리 달레나(Kiri Dalena)의 집이, 처음 온 타국에서 방문한 타인의 집이 그처럼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이 인제 와 놀랍다. 분명 다르지만 어딘가 닮아 공감할 수 있는 정치사, 그 사회 속에서 고민을 마주하는 개개인이 슬픈 와중에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만남(들)이 있기 때문이다.
간이 의자를 모두 내릴 정도로 가득 찬 인원을 싣고 한참을 가던 작은 버스 안의 기억을 소환해 본다. 큐레이터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모인 열댓명의 사람. 고만고만한 나이대에 걸맞은 아직은 모호한 모종의 장래 희망을 갖고 모여 미술 이야기보다 연애 이야기에 더 열을 올리던 모습을 생각한다. 짝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나오는 튀어나오는 ‘퍼포먼스’라는 말-농담-에 웃을 수 있는 그 공통감이 우리를 묶어놓는다. 사사롭고 즐거운 대화가 긴 하루 내내 머물렀다가 아직까지도 불쑥 떠오른다.
내밀한 장소, 시시한 대화, 온전할 수 없는 언어의 충돌이 애정 안에서 이루어진다. ‘실례’일 수 있을 법한 행위가 사랑이 되는 과정을 곱씹는다.
막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무언가를 사랑하기란 놀라우리라 만치 쉽다. “바공 필리피나스 Bagong Pilipinas(New Philippines)”1) 프로파간다를 차를 타고 다니는 긴 시간 내내 마주치면서 무의식적으로 되새긴다고 생각해 보자(심지어 마닐라의 교통체증은 굉장했다). 정치를, 예술을 한다는 것은 산재한 긍정의 강요를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의심은 발화하는 데에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만남들을 지속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 사랑이 작은 불씨가 되는 곳에서.
1)“새로운 필리핀”이라는 구호를 필두로 “나는 새로운 필리핀이다 AKO ANG BAGONG PILIPINA”, “돈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새로운 필리핀인 MARUNONG HUMAWAK NG PERA ANG BAGONG PILIPNO”, “자문화에 긍지를 갖는 새로운 필리핀인 MAY PAGMAMALAKI SA SARLING KULTURA ANG BAGONG PILIPINO”,”새로운 필리핀의 모던 교통 MODERNONG TRANSPORTASYON SA BAGONG PILIPINAS” 등의 변주가 있다. ‘똑똑’하며 ‘자부심’이 있고 ‘모던’한 필리핀이라는 현 정부의 모토를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시일 것이다.
— 한문희(DCW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