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유진
극작가, 연출가
907 대표
학력
한양대학교 유럽언어문화학부 독일어권언어문화전공 졸업
경력
작, 연출
2021 연극 <홍평국전>
2020 연극 <제4의 벽>, <처음이야>, <어슬렁>
2019 연극 <9월>, <907 단막극장_ 사과나무, 나 여기 바닥에 있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홍계월전>
2018 연극 <나의 사랑하는 너>, <9월>, <나 여기 바닥에 있어>
2017 연극 <초인종>, <얼굴>, <운동장에서>
2016 연극 <코끼리무덤>, <목격형연극 벽>, <초인종>
연출
2020 연극 <맥거핀>, <미국연극/서울합창>
2019 연극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 <너에게>, <마르지 않는 분명한 묘연한>
2018 연극 <누구의 꽃밭>
극작
2015 연극 <씨름>
심사평
이제 연극의 무대는 단순히 이야기가 담긴 박스(box)가 아니라 배우에 의해, 특히 그의 몸과 소리에 의해 그리고 음악과 조명의 상호관계 맺음 속에서 어떻게 분할되고 통합되는가에 따라 그 잠재성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공간이다. 오늘날 연출가가 수행하는 미학의 차별성 또한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가 어떤 주제 혹은 이야기를 인간과 세상에 대한 화두로 삼는가는 여전히 주목할 부분이다.
그러나 그가 이 이야기를 관객과 공유하는 방법의 문제, 즉 무대 위의 각 매체들 하나하나에서 이야기에 상응하는 질감과 리듬을 찾아내고, 이를 관객이 마주한 무대라는 공간 안에서 감각적으로 혹은 입체적으로 구현해내는 방식은 우리가 특정 연출가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한 근거가 아닌가 싶다.
그는 배우와 음악, 조명, 오브제 등을 단순히 하나의 희곡의 언어를 전달하는 기호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 부여된 관습적 틀을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툭툭 건드려 보면서,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파동으로 무대를 공감각적 공간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것은 현재 극작과 각색, 연출의 전 영역을 활발하게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설유진의 연극을 이루는 바탕이기도 하다. 그의 연극은 작품이 공연되는 극장의 기존 흔적을 가능한 한 지우고 비워낸 뒤, 배우에서 소리, 빛, 오브제를 그만의 방식으로 전혀 새롭게 다시 배치한다. <9월>(2019)에서는 바닥에 그려진 두 개의 흰색 선과 주변에 배치된 몇 개의 의자로 많은 사람들이 도착하고 스치듯 머물렀다 떠나는 기차역의 열린 공간성과 일시적 리듬을 담아냈다. <너에게>(2019)에서는 무대를 최대한 넓게, 그리고 최대한 비운 상태에서 부분부분 조명을 적절히 가미해 극장을 하나의 자궁처럼 만들었고, <레몬 사이다 썸머 크린샷>(2019)에서는 극장 자체를 농구경기장으로 만들었다. <제4의 벽>(2020)과 <홍평국전>(2021)에서는 연극의 서사와 잇닿을 수 있는 흔적마저도 깨끗이 지워 철저한 무중립의 빈 공간으로 만들었다. 무대 한가운데 객석을 만들어 관객을 앉게한 뒤, 배우들은 공연 내내 그 바깥 주변을 빙둘러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수행한다. 이런 식으로 지우고 다시 세워진 공간에서 배우의 움직임이나 발화, 빛과 소리는 매우 독특한 존재감을 갖는다. 특히 전사(戰士)나 농구선수 등 그 어떤 역할을 수행하든지 간에 배우들의 모든 말과 움직임은 그들끼리의 극중 대화를 넘어서서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관객을 향한 말걸기가 되면서 극장 밖 세상에 대한 새로운 상생과 연대로관객을 초대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공간의 언어들은 오로지 설유진이란 한 연출가의 개인적 착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설유진은 연출로서 희곡 혹은 대본을 들고 무대를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배우들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거듭 질문하면서 그들로부터 얻은 답으로 자신의 틀을 계속해서 수정해나간다. 그로 인해 연습의 과정은 때때로 혼란스럽기도 하고 지루해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 과정이 연출에게는 연출이 배우를 비롯한 여러 스태프들과 함께 그들 각각이 품고 있는 언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 주체적으로 접점을 찾아가는 매우 생산적인 시간이다. 설유진의 연극을 보고 극장문을 나설 때, 그 무대에 섰던 배우들이 혹은 어떤 소리, 혹은 어떤 빛이 유난히 지워지지 않고 내내 기억되곤 하는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특히 올해 공연한 <홍평국전>은 설유진 자신이 지향하는 연극의 가치와 양식에 잘 들어맞는 작품을 골라 창의적으로 각색하고, 무대를 한정된 공간 너머의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 주목할 공연이다.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남장을 하고 전쟁영웅으로 살아가는 홍평국이라는 인물과 주변의 남성인물들까지 여성배우들이 연기하는 설정은, 진부한 젠더 관념을 통렬히 깨부순다. 황순미, 김보은 라소영 등 여섯 배우들의 젠더중립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홍계월/홍평국의 주체적 삶이 극장의 공간과 시간 안에 종횡으로, 수직으로, 수평으로 기입된다. 교회 안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운 다양한 질감의 조명과 음악, 무엇보다 극장 창문을 통해 극장 안으로 하얗게 쏟아지는 햇빛 또한 그 특유의 물질성으로 기여한다.
열악한 창작조건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내내 쉬지 않고 극장 공간을 두드려 찾아낸 설유진의 언어들이 5년, 10년 이후에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그의 행보들이 유의미한 뿌리를 내려 한국 연극 전반에 의미있는 동력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_심사위원 김미도 윤한솔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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